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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정신병동 의사의 고민

작성자
admin
작성일
2015-06-10 11:19
조회
872
[의사들이 쓰는 병원이야기][3]정신병동 의사의 고민

• 보호자 없으면 완치돼도 퇴원못해
발행일 : 2007.06.06 / 사회 A10 면 기고자 : 권준수


정신과 전공의 시절, 한 정신병원에 파견 나가 한 여성을 만났다. 당시 30대 후반이었던 그 여성은 ‘알코올 중독’이었다. 불우한 가정 형편을 술로 달래다 얼굴에 화상(火傷)까지 입어 일그러진 상태였다.

나는 이 여성을 오랫동안 면담한 뒤 퇴원명령을 내렸다. 환자상태로 보아 더 이상 입원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입원 후 재활 의지가 높아 상당히 호전되어 있었다. 오랜 병원 생활로 심신이 지치고 무기력해 보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병원에선 환자의 퇴원을 만류했다. 환자의 가족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병원측은 보호자가 없는 상태에서 환자를 그냥 퇴원시키면 어떤 사고가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럴 경우 책임이 환자를 퇴원시킨 병원측에 돌아올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여성은 단지 술을 심하게 먹었다는 것 외에는 판단력의 장애를 보인다는 어떤 증거도 없었다. 오히려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도 정신과 담당 주치의인 전공의들이 이 여성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파견기간을 마친 뒤 본 병원으로 돌아가면 그녀는 한평생을 정신과 보호병동에서 지내야 할지 모른다.

결국 나는 병원 직원과 한바탕 승강이를 벌였다. 환자가 퇴원 후에 생길 수 있는 모든 일에 책임을 진다는 각서에 서명도 했다. 의사가 아닌 보호자 명의로 말이다. 이런 방법으로 이 환자 외에 몇 사람을 더 퇴원시킬 수 있었다. 이들은 퇴원 후 술을 먹지 않고,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의지가 충분하다는 믿음이 섰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가족들의 비협조나 병원의 수동적인 태도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정신과 환자들의 일부는 가족들이 있는데도, 찾아오지 않는다. 병원까지 수동적이니까 장기간 입원하는 환자가 많다. 환자가 밖에 나와 문제를 일으키는 것보다 병원에 있는 것이 더 낫다는 이유이다. 일부 가정 형편이 어려운 보호자들은 병원비를 감당할 능력이 없어 아예 병원과 연락을 끊어 버리기도 한다. 병원에선 이런 환자를 무리하게 퇴원시킬 필요도 없다. 보호자가 없는 행려환자라면 정부에서 지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나 병원의 입장에선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는 환자들을 병원에 입원시켜 놓으니까 좋고, 가족들은 병원에서 대신 보살펴 주니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그렇다면 한 명의 인간으로서 환자의 권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퇴원해서 사회의 일원으로 돌아가 인간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그들에겐 있다. 가족과 병원이 이들을 방치함으로써 보호병동에서 자신의 남은 생을 마감하게 될 경우, 한 인간으로서의 존재가치를 짓밟는 것이 돼 버린다는 얘기이다.

나는 그로부터 3년 뒤 우연히 내가 근무하는 병원에서 그 여성을 다시 만났다. “선생님 덕분에 정신병원에서 퇴원할 수 있었다”며 “고맙다”고 했다. 혼자 살며 어렵게 모은 돈으로 우선 성형 수술부터 받으러 병원에 왔다고 한다. 그 여성은 완전히 새로운 삶을 찾은 듯 활기가 넘쳐 보였다.

이후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의사인 나의 판단과 행동이 한 사람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늘 되새긴다. 의사가 됐을 때의 초심(初心)으로 돌아가 치료 행위 하나하나를 더욱 신중하고 정확하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권준수 (서울대 의대, 정신과학교실)